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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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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재부가 위냐 국회가 위냐

기재부는 예산편성권, 국회는 심의·확정권 쥐고 반복되는 ‘해묵은 질문’
등록 2020-05-09 16:27 수정 2020-05-13 10:14
문희상 국회의장이 2019년 12월10일 국회 본회의에서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의원들의 항의 속에 2020년 예산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문희상 국회의장이 2019년 12월10일 국회 본회의에서 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 의원들의 항의 속에 2020년 예산안 가결을 선포하고 있다. 한겨레 강창광 선임기자

“기재부(기획재정부)가 위예요, 국회가 위예요?”(지상욱 당시 바른미래당 의원)

“기재부와 승인된 범위 내에서, 그 사업별 항목 범위 내에서 하게 됩니다.”(통일부 장관)

“아니, 그러니까요. 알겠는데,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렇게 예산 심사를 국회의 승인 받은 다음에 기재부하고 또 하고 또 내용 바뀌고 그 이후에는 국회에 보고도 안 하지 않습니까? 그냥 하시는 것 아니에요? 국회 예산심의권이라는 게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않습니까?”(지 의원)

2018년 11월9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 풍경이다. 남북협력기금 사용을 두고 벌어진 논쟁은 “기금은 기금운용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것으로 기재부가 승인하는 것은 아니다. 변경 내용은 국회에 사후 보고한다”는 기획재정부 2차관의 설명으로 일단락된다. 하지만 “기재부가 위냐, 국회가 위냐”는 말은 예산과 법안을 심의하는 국회 상임위원회, 예결위 회의 등에서 수시로 터져나오는 질문이다. 헌법에선 삼권분립을 명문화하지만, 현실에서는 입법부·행정부·사법부 사이 ‘권력 분립’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국정감사 등에서 국회의원이 관료를 몰아세우는 풍경 뒤에는 대의기관인 국회가 행정·사법 관료들의 ‘보이지 않는 손’에 휘둘리는 상황도 동시에 존재한다. 이런 상황은 법과 제도에서 비롯됐지만 국회가 자초하기도 했다.

모호한 삼권분립 경계 속 휘둘리는 국회

‘헌법 제54조 ①국회는 국가의 예산안을 심의·확정한다.’ ‘헌법 제57조 국회는 정부의 동의 없이 정부가 제출한 지출예산 각 항의 금액을 증가하거나 새 비목을 설치할 수 없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예산안 심사 때 매번 갈등을 빚는 배경에는 헌법 제54조와 제57조가 자리잡고 있다. 헌법은 정부가 예산안을 편성하고 국회가 이를 심의·확정하도록 하는데, 국회는 예산을 깎는 감액 권한을 행사하지만 예산을 늘리는 증액은 행정부(기재부) 동의가 필요하도록 했다. 행정부를 견제·감시할 권한과 책임을 입법부에 주는 동시에 행정부에도 입법부를 견제할 수단을 줬다. 긴급재난지원금 100% 지급과 70% 지급을 둘러싼 여당과 기재부의 충돌은 근본적으로 헌법에서 규정한 입법부와 행정부의 역학 관계라는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민주화 이후 대의기관으로서 국회의 위상이 커지며 국회 안팎에서 헌법 제54조와 제57조가 입법부의 예산심의권과 재정통제권을 제약한다는 주장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예산은 정당과 정치가 지향하는 가치를 보여주는 숫자인데, 행정부가 편성을 독점하는 것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인 입법부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연말 ‘예산 국회’가 되면 여야는 ‘핵심 예산’ 증액을 위해 기재부 앞에서 ‘을’이 된다. 무엇보다 예산편성을 규정하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회가 심의·확정한 예산은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행정부가 이를 따르지 않더라도 제재할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에 18대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예산을 법률에 근거해 국회가 꼼꼼히 심사하자며 ‘예산법률주의’ 도입 주장이 꾸준히 나왔다. 2018년 3월26일 발의된 문재인 대통령의 개헌안에도 예산법률주의 도입이 포함됐다.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은 예산법률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국내 도입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국회의 예산 심의 전문성에 대한 불신과 ‘쪽지 예산’으로 대표되는 지역구 민원 사업 예산 증가에 대한 부정적 시선 때문이다. “예산법률주의를 도입한다고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예산 편성과 집행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며 재정민주주의의 강화는 국회의 현실적인 예산안·결산 심의 역량에 달려 있다는 반대 입장이 있다.”(국회입법조사처 ‘예산법률주의 도입을 둘러싼 쟁점’, 2018년 2월)

행정부에 법안 제출권이 있고 입법권이 행정부와 입법부에 나뉘어 있는 현행 체계도 항상 논란의 대상이다.(헌법 제52조 국회의원과 정부는 법률안을 제출할 수 있다.) 외형적으로는 14대 국회(정부 법안 발의 581건, 의원 발의 321건) 이후 국회에서 의원 발의 법안이 정부 발의 법안을 압도(20대 국회 정부 발의 1094건, 의원 발의 2만2981건)하지만, 정부가 법률안을 ‘의원 이름을 빌려’ 발의하는 ‘청부입법’ 꼼수도 그만큼 늘고 있다. 정부가 법안을 제출하려면 절차가 까다로워 최장 1년이 걸리지만 의원 발의는 동료 의원 10명의 동의만 받으면 바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에서 법 만들어 의원에게 주는 ‘청부입법’

실제로 의원 법안 발의 건수가 급격하게 증가한 18~20대 국회 상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등의 회의록을 살펴보면 ‘청부입법’이란 말이 꾸준히 등장한다. “이 법안을 실질적으로 누가 만들었냐? ○○○ 부처에서 법안을 만들어서 △△△ 의원에게 준 것 아니냐”는 의원의 질문에 해당 부처에서 “그렇다”고 인정하는 경우가 회의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입법 실적을 쉽게 올리려는 의원들과 복잡한 절차를 피하려는 행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생기는 일이다. 정권과 상관없이 여당이 입법부로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청와대 거수기’ 노릇을 하는 현상도 청부입법을 부채질한다. 이 과정에서 장차관 출신 의원들이 정부 법안 발의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2015년 말 국회 여야 갈등의 중심에 섰던 ‘원샷법’(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은 관료 출신인 이현재 당시 새누리당 의원을 통해 발의됐다. 기업의 산업 재편을 지원하기 위해 공정거래법과 상법 등의 주요 규제를 대거 완화해주는 내용을 담은 이 법은, 애초 재계 목소리를 반영해 기재부와 산업통상자원부가 정부 입법으로 추진하던 법안이었다. 기업 특혜 논란이 불거질 수밖에 없는 법안인데, 국회가 행정부의 ‘숙원 법안’을 대변한 모양새가 연출됐다.

입법부가 ‘큰 그림’ 그려야

정권이 바뀌어도 논란은 계속된다. 2017년 12월5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권성동 위원장(당시 자유한국당)은 ‘새만금사업 추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 등을 심의하며 “국토부(국토교통부)가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아니하고 청부입법 형식으로, 이런 식으로 법안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데 선수이다. 정말 국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다”라고 국토부를 질타하기도 했다.

문제는 코로나19로 초래된 유례없는 사회·경제적 비상 상황에서 입법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곳곳에서 고통받는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들어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요청이 21대 국회로 향하고 있다.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정치의 오래된 정의가 21대 국회의 출발선 앞에 다시 놓였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코로나19가 워낙 불확실한 상황인데다 총선까지 치르며 여당이 긴급재난지원금 논란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21대 국회에서는 거대 여당이 청와대와 정부 사이에서 중심을 잡고 제 목소리를 내며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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